17절.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회중이 다 초막을 짓고 그 안에서 거하니 눈의 아들 여호수아 때로부터 그날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이같이 행한 일이 없었으므로 이게 크게 기뻐하며
1. 창조 세계는 쉽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린 중요한 창조 세계 한 가지를 쉽게 잊고 삽니다. 바로 ‘시간’입니다.
2. “태초에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창1:1)는 말씀 속에서 시간이 시작되었습니다. ‘태초’라고 말씀하시는 순간 시간이 시작된 것입니다.
3. 공간은 대물림 됩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중간에 다시 창조된 일이 없습니다. 하늘과 산, 강과 바다는 모두 첫 사람들이 보던 그것들입니다.
4. 시간은 어떻습니까? 강가에서 노는 아이가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듯, 우리도 시간의 연속되는 흐름을 온전히 느낄 수 없지만, 시간은 삶의 리듬 속에서 연속성을 갖고 대물림 됩니다.
5. ‘살아 있는 한, 인간은 언제나 움직이면서도 지나온 것들을 그대로 간직하는 특권을 누린다. 과거의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현재의 우리 안에 남아 있다’는 루이스의 통찰*이 기억납니다.
6. 어린 시절의 내가 어떤 식으로든 오늘의 내 안에 남아 있듯, 과거의 역사는 어떤 식으로든 오늘의 역사에 연속되고 있습니다. 나쁜 것이든 좋은 것이든 말입니다.
7.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신 분은 우리 삶에 관여하신 신비들을 그 후손들도 간직하길 바랍니다. 기억하여 지키라는 말씀이 그 뜻입니다.
8. 그 관여하신 시간들을 대물림 하는 방식이 무엇입니까? 바로 절기입니다. 절기를 기억하는 것은 인격 없는 종교활동이 아닙니다. 말씀의 역사를 몸에 익히는 연습입니다.
9. 절기는 시간의 마디입니다. 시간을 창조주가 붙들고 계시다는 표지석입니다. 시간의 창조자를 기억하고, 시간 속으로 찾아오신 신비를 오늘에 다시 살아내는 것입니다.
10.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초막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누추한 초막에 살며, 구원의 날을 기억하고, 광야의 삶을 이곳에서 재생하고 있습니다. 예식의 반복이 아니라, 역사의 반복입니다.
11. 후손들은 그 절기를 기억하고, 짧게 반복하면서, 이 시간과 삶에 관여하신 하나님의 신비에 동참합니다. 이 일은 말씀을 몸에 익히는 경건의 연습과 같습니다.
12. 완성자 그리스도를 맛본 우리에겐 주일이 그렇고, 부활절이 그렇고, 성령강림절과 감사절이 그런 마디들입니다. 성만찬의 떡과 포도주도 같은 원리입니다. 이것은 몸으로 말씀을 익히는 오래된 방식입니다.
2016.06.15. 노병균목사 『아침묵상』 ‘주일, 다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다’
* C. S. 루이스 『시편사색』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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