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절. 그런즉
너희는
그들에게
오늘이라도
그들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과
집이며
너희가
꾸어
준
돈이나
양식이나
새
포도주나
기름의
백분의
일을
돌려보내라
하였더니
1. 역사는 진자운동과 같습니다. 좌로 치우치면 곧 우로 향하고, 외부의 갈등이 발생하면, 동시에 내부의 곪은 문제가 드러납니다. 역사의 요동은 깊은 속까지 드러냅니다.
2. 총독 느헤미야가 이끄는 복원 이스라엘은 다시 큰 문제에 직면합니다. 내부문제입니다. 빈부격차와 계층, 미움과 반목입니다. 성벽이 조금 회복되자, 내면의 죄성도 회복되고 있습니다.
3. 내면의 동력이 삶으로 드러나는 것을 인격이라고 합니다. 이 격(格)을 따라 세상의 것이 유통되고 삶을 살찌우는데, 격이 엉망이면 사회가 거꾸로 갑니다.
4. 힘있는 자에게서 없는 자에게로, 더 가진 자에게서 못 가진 자에게, 높은 곳에서 낮으로 곳으로 흐르는 것이 순리인데, 내면의 동력이 병들면 사회의 흐름이 바뀌어 역리가 됩니다.
5. 이 문제 속에서 복원 이스라엘 백성의 내면 동력이 보입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까? 우리가 이곳에 살고 있는 이유가 뭐고 살게 하는 힘이 무엇입니까?
6. 놀랍게도 내면 동력이 없이 살 수 있습니다. 이를 ‘편승(便乘)’한다고 합니다. 시대에 편승하고, 집단에 편승하고, 유행에 편승합니다. 생각 없이 줄을 서고, 생각 없이 박수 치며 살 수 있습니다.
7. 편승하는 자는 가볍고, 자신이 무얼 하는지도 모른 채 바람에 휘날립니다. 기껏 종살이 끊고 이곳에 왔는데, 이제 서로 착취하고 있습니다. 떠나온 바벨론을 이곳에서 만들고 있습니다.
8. 결국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더 갖기 위해서입니다. 더 높아지기 위해서 입니다. 더 위세 부리기 위해서 입니다. 이런 것들이 성벽을 무너지게 했는데, 다시 추구하고 있습니다.
9. 반면 이 장면을 통해 총독 느헤미야의 내면 동력을 봅니다. 그는 왜 왔습니까? 유력한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함도 아니요,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함도 아닙니다. 물질의 더 쌓기 위함도 아니요, 권력과 힘을 더해 행세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10. 회복된 시온의 성벽, 그리고 그 안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 이것이 그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 무너진 백성의 마음을 일으켜 세웠고, 자신을 성벽의 한 귀퉁이 돌로 드렸습니다.
11. 역사는 진자운동과 같다면 결국 가운데로 수렴됩니다. 그 역사의 추가 자신의 모든 질량을 의지하고 있는 자리, 곧 역사를 붙들고 있는 그 가운데를 향해 반드시 멈추게 됩니다.
12. 나는 왜 이곳에 서있습니까? 왜 벽돌을 올리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고하고 있습니까? 총독 느헤미야의 이야기를 통해 내 내면적 동력을 확인하게 되고, 이 흔들리는 삶을 붙드시는 분을 더욱 그리워하게 됩니다.
2016.06.08. 노병균목사 『아침묵상』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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