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6. 14. 08:29 묵상/아침묵상
44절. 그들이 그래도 산꼭대기로 올라갔고 여호와의 언약궤와 모세는 진영을 떠나지 아니하였더라. [또 다른 불순종] 1. 행동한다고 순종이 아닙니다. 순종은 결과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동기에 의해 결정되는 일입니다. 2. 마치 청개구리처럼 이스라엘의 여론은 또 반대로 흐르고 있습니다. 이제서야 정탐한 땅으로 올라가겠다고 요란을 떨고 있습니다. 3. 올라가라고 할 때는 여러 핑계와 불신으로 머뭇거리더니, 광야에서 다음세대를 준비하겠다고 하니 이제서야 올라가겠다고 아우성입니다. 4. 듣고도 지체하는 것이나, 듣지 않고 올라가는 것 모두 불순종입니다.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을 잘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순종이란] 5. 우리의 오해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와 일을 하고 싶어한다는 생각입니다. 아닙니다. ..
2017. 6. 12. 07:09 묵상/아침묵상
38절. 그러나 그 땅을 정탐한 사람 중, 오직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만 살아 남았다. [PT] [계속되는 불평]1. 인생은 비탈길에 서 있는 수레와 같습니다. 제 힘으로 서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뒤에서 밀어주는 힘 때문에 서있고 앞으로 나갈 수 있습니다.2. 위태한 착각은 이 인생의 본질을 잊고 마치 제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순간입니다. 이 순간 자기 밖의 존재들은 모두 거추장스러운 것들일 뿐입니다.3. 불평은 이 착각에서 시작합니다. 이끌어 주는 은총을 잊었기에 감사가 사라지고, 감사가 없는 텅빈 마음은 불평하는 꽹과리가 됩니다.4. 하루 이틀의 문제가 아닙니다. 불평 없던 날을 꼽는 것이 더 쉽습니다. 지금껏 서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참으시는 그분의 인내 때문이었습니..
2017. 6. 9. 09:49 묵상/아침묵상
32절.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다양한 안목] 1. 시선의 높이가 그 사람의 크기입니다. 시력은 밖의 사물뿐 아니라, 자신의 수준을 전시하는 행위입니다. 2. 그래서 사물을 보고 분별하는 견식을 안목(眼目)이라 합니다. 안목의 중심추는 밖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겁니다. 3. 대상은 하나이지만 그것을 보는 안목이 다양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양하기 때문이지요. 4. 그렇기에 어떤 현상이나 사실을 보고 그것을 진술하는 것은 ‘보는 행위’가 아니라 ‘판단하는 행위’입니다. 이 순간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판단의 틀] 5. 자기가 본..
2017. 6. 5. 06:31 묵상/아침묵상
25절.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하지 아니하였더라[선택이 아니라 필수]1. 성령이 우리의 인격과 삶에 관여하시는 사건, 그것은 성도들에게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성도란 이 사건을 경험한 사람들을 일컫습니다.2. 자녀됨이 자격증으로 인정받습니까? 아닙니다. 자녀로 태어났고, 자녀라면 그 영혼 깊은 곳에 자연스럽게 진(Gen)이 녹아있는 것입니다.3.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성령세례’니, ‘성령충만’이니 쪼개고 구분하려 하지만, 그런 구분이 뭐 필요합니까?4. 컵에 물을 채우는 것과, 물이 가득 찬 컵이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다 하나입니다. 관건은 우리 안에 성령이 부어졌다는 그..
2017. 5. 31. 08:54 묵상/짧은묵상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마13:3-4a) "바보같은 농부입니다. 길에, 자갈밭에, 잡초밭에 그냥 씨를 뿌리는 농부는 없습니다.바보 농부 이야기는 그분 이야기입니다. 그 바보는 자기가 뿌리는 종자씨를 아까워 하지 않습니다. 단지 땅에만 관심이 있습니다.누가 밟힌 길, 자갈밭, 잡초밭일까요? 적어도 '한 사람' 이상인 것은 확실합니다.인생에서 중계석은 없습니다. 삶의 운동장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경기장 안에서 생각하면 그 못쓸 밭이 누구인지 알고, 그 바보 같은 농부는 고맙기만 합니다.낭비하는 바보 농부, 기다리다 눈먼 바보 같은 아버지, 자기 자신을 씨로 이 땅에 뿌린 착한 아들. 그분들 때문에 삽니다. 더 놀라운 것..
2017. 5. 30. 08:39 묵상/아침묵상
11절. 둘째 달 열넷째 날 해 질 때에 그것을 지켜서 어린 양에 무교병과 쓴 나물을 아울러 먹을 것이요.[절기의 의미]1. 규칙적인 리추얼은 우리를 공통된 기억의 뿌리로 인도하는 신비가 있습니다.2. 절기를 지키고, 정해진 규칙을 함께 지키므로 공동의 기억은 공동의 정체성을 형성하도록 돕습니다.3. 이스라엘에게 유월절과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의 시간들은 그들 정체성을 형성하는 결정적 사건입니다.4. 이 시간의 이정표에는 그들이 함께한 기억들, 그 속에 역사한 하나님의 사건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절기의 본질]5. 그러나 리추얼은 자칫 오늘의 시간을 과거에 묶어 두는 시간의 감옥이 되기도 합니다.6. 공통된 사건과 기억을 강력하게 소환하기 때문에 오늘의 시간과 사람들이 조연이 될 위험이 늘 있습니다...
2017. 5. 29. 08:34 묵상/짧은묵상
“너희가 얻게 될 유일한 증거는, 증거처럼 여겨지지 않는 요나의 증거뿐이다.(Msg 12:39) "요나의 증거뿐이다" 요나의 증거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은유입니다. 예수는 더 요란한 기적이나 논리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제시합니다.'사실'만큼 강력한 증거는 없습니다. 보잘 것 없고, 화려하지 않아도 '사실'에는 힘이 있습니다. 가끔 '진실'은 내 생각과 다른 때가 있습니다. 아니 자주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진실'에 눈 감거나, 귀를 막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그랬습니다. 눈을 떠야 합니다. 불편하더라도 '진실'을 대면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대한 진실' 앞에 초라한 나 자신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는 진실입니다' 종교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 예수를 만나면 지금까지의 주객이 전도됩니다. ..
2017. 5. 27. 08:14 묵상/짧은묵상
“이것은 전쟁이며, 중립지대는 없다. 내 편이 아니라면, 너희는 적이다. 돕지 않으면 방해하는 것이다.(마12:30 Msg)” 하나님 나라의 사람은 그분의 돌봄 속에 사는 사람입니다. 돌봄 속에 있거나, 방치되어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중립지대는 없습니다.하나님 성령의 영향력 아래에 사는 사람을 하나님 나라 백성이라고 말하고, 전장에서는 하나님의 편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전쟁 중입니다. 중립지대는 없습니다. 대장의 군호에 따라 움직이지 않으면 방해하고 있는 것입니다.“하나님의 돌봄 아래에 있다면, 이미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임했다. 그분의 영을 거스르지 말아라. 통신선이 끊어지면 희망이 없다. 그분의 영이 너희 안에 있다면, 걱정하지 말아라. 좋은 열매를 맺는다."노병균목사의 아침묵상, 中.....
2017. 5. 26. 11:05 묵상/짧은묵상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마12:8)” 율법에 얽매인 상태를 성경은 '종살이'라고 합니다.(롬7:6) 누구에게 팔려서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잃으면 종입니다.이런 규범과 율법의 종살이를 끝내는 길이 있습니다. 그 부자유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습니다. 바로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입니다.(롬8:1-2)참 안식은 예수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으로 들어 가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 거하십시오. 그곳이 자유지대입니다. 자유를 얻기 위해 자유를 파는 일은 없습니다. 조금 멈춰도 됩니다. 멈추고 싶다면, 길에서 떨지 마시고, 따듯한 그 분 품 안에 들어와 쉬십시오. "우리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우리를 지킵니다."(마르바 던)노병균목사의 아침묵상, 中...(http..
2017. 5. 24. 10:20 묵상/아침묵상
23절.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축복하라] 1. ‘노예’, ‘유아살해’, ‘고된 노동’이라는 말이 이력서의 전부였던 이스라엘에게 ‘축복’(Barak)이라는 단어는 낯선 언어였습니다. 2. 수백 년 간 묶여 있던 그들을 불러내시고, 잊고 있던 단어, ‘바라크’를 부활시킵니다. 창조의 날 아담의 코에 불어 넣으셨던 생기처럼 말입니다. 3.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세 가지 복의 줄기를 선물해 줍니다. 우리의 탁한 욕망에서 기인하지 않은 맑은 생수와 같습니다. [예바레키카 아도나이] 4. 복은 ‘붙들어 주시는 주님(예바레키카 아도나이)’입니다. 이는 만남의 축복이고, 길 잃은 우리가 삶의 좌표를 발견한 일입니다. 5. ‘붙들어 주심(예바레키카)’은 사건의 언어입니다. 그가 먼저..